일본에서 2005년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로 에도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맛보기로 선택한 소설이었다.
일단은 책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에도시대(도쿠가와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우리나라로 말하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으로 고종까지를 말한다.
상권
- 바다토끼
- 파도 밑
- 귀신 오다
- 어둠은 흐른다
- 고독한 죽음
- 마른 폭포의 그림자
- 아득한 목소리
- 죽음의 그림자
하권
- 어둠 속에 사는 자
- 검은 바람
- 산울음
- 깊은 흐름
- 소란
- 마루미의 바다
외딴집 책을 펼치니 처음에 나타난 에도 시대의 주요 관직에 대한 설명에 주춤했다.
일단은 이곳에 이런 설명이 있었다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넘어갔다.
시대적 배경, 계급과 직업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상태에서 용어에서 오는 낯섦까지 더해지니 소설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호'는 바보의 '호'다.
호는 어머니가 요로즈야의 도련님과 정을 통해 생긴 아이였다. 처음부터 요로즈야의 입장에서는 원수였다. 자라지 못하고 죽기를 바란 아기였다. 어머니가 죽고 말았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호는 살아남았다.
요로즈야가를 위해 '호'는 수백리 떨어진 '곤비라 신사'로 참배를 가지만 붙여준 하녀의 배신으로 막막해 졌을 때 '주엔지'라는 무너져 가는 절의 주지스님 '에이신'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정말 이름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약해졌을 뿐이야"
'에이신'의 도움으로 이노우가에 머물게 된 '호'는 그곳에서 '고토에'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받는다.
"바다에는 작고 하얀 파도가 많이 치고 있지? 저럴 때 이곳 사람들은 '토끼가 날고 있다' 고 한단다.
토끼가 날면, 지금은 날씨가 아무리 맑아도 반나절도 못 되어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거야.
멀리서 보면 작고 하얗고 예쁜 토끼지만, 그건 하늘과 바다가 거칠어질 징조거든."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되지.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을 계속 믿는 척하는 것은 괴롭지만, 정말로 믿어 버리면 훨씬 편하다."
"흉해지는 민심을 억누르려고 위에서 손바닥에 힘을 주면, 그 손바닥에 달라붙은 벼룩도 저도 모르게 같이 으스대지. 그런 걸세. 벼룩이 거드름을 피워 봤자 손바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마루미의 위정자들은 성 아래 사람들이 지금의 이 한심한 꼴처럼 가가 님을 두려워하고 꺼리기를 바랐다."
한줌밖에 되지 않는 위정자가 자기 형편에 맞추어 세상을 해석하고 움직이는 시대는 곧 끝난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진리를 알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을 바라고, 눈을 빛내며 미래를 이야기할 때의 게이치로는 한 사람의 젊은 의원이었다.
나라의 정치를 맡아서 하는 사람 위정자, 겉으로 착한 체하는 사람 위선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가?
소설 속에서 '호'를 가엽게 여기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 '호'의 주변에서 힘없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호'가 무언가를 해 내주기를 바라며 읽었다.
기대하던 통쾌한 복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약한 소녀에 대한 주변의 희생에 속만 더 타들어 갔다.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내몰렸을 뿐이다. 너를 보살필 정도로 신분이 낮은 자였을 테니까."
소수의 지배계층에 의해 정보는 은폐되고, 진실은 조작되고,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반 서민들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고, 결정은 하지만 책임은 아래로 부터 지게 하는 위정자의 비정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당연하단 듯이 말한다.
그들의 비정함에 그나마 꿈틀거리는 나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힘없이 사라진다.
힘 있는 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누가 승리하는지는 서민들은 관심이 없다. 누구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권력이 전체를 위한 것처럼 포장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거리낌 없이 희생시킨다.
가가 님이 네 목숨을 구해주셨단 말이다. 그때 겐슈 선생님은 몸 안쪽에서 햇빛이 비쳐 나오는 것처럼 밝고 기쁜 얼굴을 하고 계셨다.
'가가'가 '호'를 구해주었다고 말한다.
정작 '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놓고 대단한 것을 해준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구해 주었다고...
정작 힘없이 죽어간 여러명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추리 장르의 쾌감을 나타내기보다는 사회 비판의 도구로 쓰는 사회파 작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편집자 노트를 통하여 『외딴집』 출간 후 가진 인터뷰 내용을 보았다.
"봉건제도의 에도 시대에는 아무리 마음이 따뜻한 서민도 권력에 대해서는 무력해 해를 입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았다는 것을 꼭 써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는 19세기 초반 도쿠가와 이에나리 집권기의 이야기를 현재의 일본 사회에 은유했다고 한다.
화가 났던 부분이 이해가 됐다. 의도된 거였다. 내가 읽고 싶었던 장르가 아니라 작가가 써보고 싶었던 장르였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은폐하고 조작할 수 있었던 시대의 가슴 아프고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지금이라면 인터넷을 무기로 하면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사회문제를 파악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지금은 평범한 여론의 힘이 권력가의 힘에 다가 갈 수는 있는지 궁금하다.
편집자 역시 외딴집을 상당히 이질적이며 시대물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를 염두에 둔 맛보기로 제대로 선택한 것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