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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한국소설

정명섭 『76층 탐정』 우리가 알던 탐정은 없다

by handrami 2025. 7. 30.

2020년에 무덤 속의 죽음으로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정명섭 작가의 76층 탐정한국 추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신선하고 명쾌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명쾌한 탐정 소설'이라는 평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와 몰입도 높은 스토리텔링으로 기존 탐정 소설에서 기대했던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뜨리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정명섭 '76층 탐정' 책표지 편집한 이미지
76층 탐정 2025년 정명섭 출판 팩토리나인

작품소개

소설의 주인공 유혜린은 항공기 승무원에서 성공한 외국인 사업가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을 이룬 여성입니다. 그녀는 77층 펜트하우스를 제외하면 가장 고가의 주거 공간인 76층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이 아파트는 층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공간적 배경은 소설의 계급적 분위기를 강화합니다.

 

어느 날, 유혜린은 취미로 배우던 요가 학원 사람들과 함께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로 떠납니다. 그곳 차문디 힐에서 동행했던 일행 중 한 명이 떨어져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은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로 인해 자살로 처리되지만, 유혜린은 석연치 않은 점들을 발견하고 사망자에 대해 독자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블랙코트'라는 이름의 사이버 장의사 팀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유혜린의 가짜 유서 의뢰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가 겪을 수 있는 위험한 사고를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는 역으로 유혜린에게 자신들을 고용해 달라고 요청하며 흥미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사건의 배경과 인물들의 숨겨진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다음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계속해서 불러일으킵니다. 과거의 조각들이 현재의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탐정' 유혜린, 전통적인 탐정상과의 간극

76층 탐정의 주인공 유혜린을 기존의 틀에 박힌 '탐정' 개념으로 바라보면, 다소 부족하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 대해 몇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전통적인 탐정의 역할과 유혜린의 방식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탐정은 발로 뛰며 증거를 수집하고, 용의자를 직접 탐문하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인을 밝혀내는 인물입니다. 셜록 홈즈, 에르큘 푸아로, 가가 교이치로 같은 탐정들이 바로 그런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혜린은 다릅니다. 그녀는 "돈과 시간, 그리고 인맥, 상류층 특권을 무기로 삼아 사건을 파헤칩니다." 그녀는 직접 현장을 누비기보다, 자신의 거대한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사건과 관련된 정보와 증거를 끌어모으고, 필요하다면 최고 전문가들을 고용하며, 심지어는 비공식적인 수사력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사건 해결을 위해 자원과 권력을 총동원한다는 점에서, 기존 탐정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2. '탐정'이라는 역할의 현대적 재해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유혜린을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탐정'이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는 '탐색하여 알아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며,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탐정의 핵심적인 역할입니다.

 

유혜린은 비록 그 방법론은 다르지만, 결국 미스터리에 직면하여 진실을 추적하고, 숨겨진 인과관계를 밝혀내며, 이를 통해 사건을 해결로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점에서 탐정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녀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자원과 방법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정명섭 작가는 이처럼 전형적인 탐정상에서 탈피한 인물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발로 뛰는 수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했을 수 있습니다 . 정보의 중요성과 네트워크의 힘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유혜린의 방식은 오히려 더욱 '현실적인' 탐정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3. 유혜린 캐릭터의 의미

상류층 특권을 통한 비판

유혜린은 상류층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사건을 파헤칩니다. 이는 사회 고위층이 지닌 정보 접근성, 인맥, 재력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거나 드러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들의 폐쇄성과 특수성을 풍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기존의 정의롭고 서민적인 탐정 이미지와 대조되며, '돈과 권력이 진실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새로운 유형의 영웅

기존의 영웅이 육체적 능력이나 도덕적 강인함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했다면, 유혜린은 정보, 자본, 지능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현대적인 '영웅'의 한 형태를 제시합니다.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고정관념 깨기

작가는 일부러 독자들이 생각하는 '탐정다움'을 비껴가는 인물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탐정이라는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유혜린을 탐정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바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기존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기보다, '탐정'이라는 역할의 정의를 확장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 속에서 탄생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독특함 때문에 76층 탐정이 더욱 신선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에 기뻐하는 인물' 설정에 대하여

소설에서 '누군가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에 기뻐하며, 그 이유가 단지 행복해 보여서 파멸시키고 싶었다'는 설정의 인물 캐릭터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으려 했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보편적인 악의 탐구

인간에게는 때때로 명확한 이유나 동기 없이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수 있습니다. '그저 행복해 보여서 파멸시키고 싶다'는 감정은 질투, 시기, 또는 타인의 평화로운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면의 불안정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악의를 통해 인간 본연의 복잡성과 때로는 이유 없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드러내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2. 사회적 통념과 공감 능력의 부재 비판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한정숙과 같은 캐릭터는 그러한 공감 능력이 결여된 채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는 행위를 즐깁니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닌 공감 능력의 부재나, 타인의 고통을 쉽게 대상화하는 경향을 비판하고자 했을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악의는 사회적 관계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3. 서사적 긴장감 조성과 예측 불가능성 부여

명확한 동기가 없는 악당은 독자에게 더욱 큰 공포와 불안감을 안겨줍니다. 흔히 악당은 복수, 욕망, 신념 등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한정숙처럼 '이유 없음' 자체가 동기가 되는 경우, 독자들은 인물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협에 노출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설정은 서사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이야기의 흐름에 강렬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4. 메시지의 불완전성과 독자의 해석 여지 남기기

작가는 때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도록 유도합니다. '이유 없는 악의'는 독자로 하여금 '왜 이런 인물이 탄생했을까?', '우리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이기에 누군가에게는 파괴의 대상이 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작품의 주제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결론적으로, 76층 탐정은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한국 추리 문학의 중요한 한 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선한 설정과 깔끔한 전개, 그리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추리 소설의 팬이시면서도 새로운 스타일과 시도에 흥미를 느끼시는 핸드라미님께 76층 탐정은 분명 매력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76층 탐정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전형적인 탐정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추리물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
  • 현대 사회의 계급과 부조리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
  • 속도감 있는 전개와 몰입도 높은 스토리를 즐기는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