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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치넨 미키토 <유리탑의 살인> 모든 것을 뒤엎는 마지막 한 줄

by handrami 2025. 6. 7.

치넨 미키토 작가는 현직 의사로 의학 미스터리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가입니다.

치넨 미키토 '유리탑의 살인' 책표지 편집한 이미지
Copyright ⓒ 2021 Chinen Mikito / 2022년 옮긴이 김은모 출판 리드비

작품소개

유리탑의 살인202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이듬해인 20226월에 한국 독자들을 만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작가가 굉장한 추리소설 마니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책 초반부터 수많은 추리소설가와 작품들이 언급되는데, 어쩌면 작가가 그동안 읽어온 방대한 지식을 한껏 드러내고 싶었던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을 통해 '셜록 홈즈', '애거사 크리스티', '에드거 앨런 포', '아서 코난 도일', '엘러리 퀸', '존 딕슨 카' 등 서양 추리소설의 거장들은 물론, 일본의 여러 추리소설가와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마치 소설 속 세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추리 문학 세계를 연결하려는 듯한 시도가 돋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대한 인용과 언급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중간쯤 나오는 '미스터리 잡학 강의'라는 표현처럼, 이 책이 단순히 이야기를 넘어 독자들에게 추리 문학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도도 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 소설을 다른 추리소설과 구별 짓는 이색적인 특징이 되었고, '강의서'로서의 역할과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기에 계속해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처럼 추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요소였고, 소설에 언급된 몇몇 작품들은 꼭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특한 시작

소설은 프롤로그에서부터 독특한 시작을 알립니다. 명탐정에 의해 연쇄 밀실 살인의 범인임이 밝혀진 '이치조 유마'가 원뿔형 유리로 덮인 전망실에 갇혀 있는 '현재' 상황을 먼저 보여준 다음, 과거 사건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는, 《유리관의 살인》은 이미 막을 내렸다.
명탐정이 진실을 밝혀내 범인인 내가 갇히는 형태로,
유리 첨탑에서 일어난 처참한 연쇄 밀실 살인은 해결됐다. 이제 범인이 할 일은 없다. 그저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p12)(p457)

 

이처럼 프롤로그에서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범인이 잡혔음을 명확히 밝히는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전개될까? 다른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강력한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이야기는 생명과학자이자 미스터리 마니아인 저택 주인 '코즈시마 타로'의 행사에 초청된 인물들이 눈사태로 인해 유리 첨탑에 고립된 상태에서 차례로 살해당하며 펼쳐집니다. 독자는 범인임을 알고 있는 '이치조 유마'와 함께 이 밀실 연쇄 살인 사건의 과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범인이 최종적으로 몇 명을 죽일 작정인지는 모르겠네요. 한 명일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에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같은 계획일지도 모르죠." (p165)

 

소설 속에는 탐정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도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도 실상은 자신의 추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지기를 그저 기다릴 뿐인 수동적인 존재, 약하디약한 존재야." (p339)

 

"분명 명탐정은 모순을 내포한 존재일지도 몰라.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 피해가 커질 때도 많지. 하지만 명탐정에게는 더 큰 특징이 있어."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야." (p348)

 

이러한 대사들은 이 소설이 단순히 트릭과 반전을 넘어, 추리 장르의 상징인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소설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개 속에서도 독자를 놓지 않는 흡인력을 지녔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복잡한 사건들이 마무리될지 궁금증을 자아내다가, 마지막에 펼쳐지는 반전은 그 걱정을 한방에 해소하는 깔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추리 게임을 끝낸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978년생인 작가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한참 동안 작가님의 작품 세계는 계속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이제 막 하나의 게임을 끝내고 다음 게임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합니다.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충격

추리 과정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소설 후반부의 특정 장면은 저에게 정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감탄이 터져 나왔던 부분이라, 그 놀라움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허를 찔린 기분이었고, 그때까지 제가 소설의 '현실'이라고 믿었던 기반이 순식간에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한 문장이 소설 전체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타이밍에 따라 독자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될 수도, 혹은 평범한 내용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유리탑의 살인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반전을 사랑하는 분
  • 밀실살인, 고립된 공간 등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요소를 선호하는 분
  •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추리 소설 관련 언급을 즐길 수 있는 분

유리탑의 살인은 독특한 구성과 방대한 추리 문학 인용, 그리고 마지막의 압도적인 반전을 통해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입니다. 기존의 틀을 깨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즐기는 독자분들께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