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물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전통적인 일본 괴담이나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3번째 작품입니다.
각 시리즈는 각각의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전작의 구체적 사건 내용이 다른 작품에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작품소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전쟁 중 육군 선박 포병교도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운명에서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구하지만, 하야타의 일행은 가혹한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방사선 피폭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피해 지역으로 들어간 학우들은 차례로 쓰러져 죽어갔다.
원자폭탄은 폭격이 이루어졌을 때의 대량 살상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악마의 무기였다..
......나만 살아남았어. p9
전후 일본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괴기 사건들을 다루며, 그 배경에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암시장" 문화가 있습니다. 이 암시장은 당시 일본의 혼란, 빈곤, 범죄, 그리고 공포를 상징하는 주요 배경으로 활용됩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인간의 밑바닥은 『붉은 옷의 어둠』에 나오는 기이하고 불길한 분위기의 근간이 됩니다.
이런 암시장은 괴담과 현실이 만나는 무대로 기능하며, 작품의 ‘실제로 있을 법한 공포’를 강화합니다.
국민을 선동한 언론은 그 어리석은 행위를 반성하기는커녕 마땅히 ‘패전 기념일’이라고 불러야 할 날을 ‘종전 기념일’이라는 기만뿐인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영악함을 발휘했다. p12
소설은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역사 인식을 반영합니다.
특히 전시 중 ‘대동아공영권’이나 ‘신체제’ 같은 용어로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며 대대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던 언론이 빠르게 민주주의 수호자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자신들의 전쟁 가담 책임을 드러내지 않는것에 대한 비판을 보여 줍니다.
종전이라는 말은 자발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패전에는 책임이 있으며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특권층이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행태에 대한 비판을 말합니다.
특권을 누리는 정치가, 자본가, 육 해군 장교라는 놈들이 패전의 혼란을 틈타 착복한 것이다.
그 물자는 분배 대신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으로 국민에게 팔렸다. 암시장의 긍정적인 부분에 드리운 진정한 시커먼 어둠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p13
암시장 자체가 악이라기보다는, 그 배경과 운영 방식에 내재된 사회적 부조리와 도덕적 타락이 진짜 문제라는 점을 말합니다.
소설은 중반을 넘어설 즈음 모토로이 하야타가 붉은 옷 괴담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기 위해 붉은 미로를 탐색하고 돌아왔을 때 밀실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 약을 1951년 ‘각성제 단속법’이 시행될 때까지 각 약품 회사가 태연히 시판했다. p255
‘히로폰이라는 상품명으로 널리 알려졌던 각성제
각성제 단속법 시행 이전까지는 각성제가 불법이 아니었고, 오히려 의약품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사회적 위험을 알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통했다는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2차대전 중 일본군은 군인의 피로 회복, 집중력 유지, 전투 지속 능력 향상을 위해 각성제를 대량 사용했습니다.
히로폰(각성제)이 합법적으로 팔렸던 역사적 사실과, 이를 방치한 국가와 기업의 무책임을 강조합니다.
“역시 나는, 광부처럼 패전한 일본의 부흥을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일을 하고 싶어.” p389
이른바 ‘등대지기’라고 하는 직무였다. 등대지기는 해상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짊어지고 있다. 패전 후 일본 경제를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해운과 수산을, 그야말로 배후에서 지탱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p391
미쓰다 신조는 과거 일본의 만행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평범한 일본인들 역시 희생자라고 말합니다.
소설을 통하여 패망 후 외면받고 고통받았던 밑바닥 인생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기리는 한편
전후 일본의 산업 기반을 밑에서 떠받치면서도 눈에 띄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야타가 결심한 앞으로 나아갈 길을 통하여 가장 밑바닥에서 노력한 그들의 힘이 일본의 부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외롭게 일하지만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는 등대지기를 통해서 상징적인 표현을 합니다.
등대지기는 조명을 통해 방향과 안전을 제시하지만 늘 그림자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삶의 위치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 합니다.
또한 패전 후 일본 경제를 다시 세우는데 필수라고 생각되는 해운과 수산을 배후에서 지탱하는 역할이라는 점도 강조하는 듯합니다.
《붉은 옷의 어둠》은 우연히 발견한 소설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띄었고, 별다른 정보 없이 선택했던, 그런 만큼 특별한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던 것이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의 혼란하고 암울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붉은 미로’라 불리는 암시장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밤의 여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 자체는 픽션이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구조적인 모순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어 마치 잘 짜인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참고문헌 목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는 탄탄한 사료 조사와 고증을 통해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 곳곳에 배어 있는 역사적 디테일은 당시 시대의 공기를 생생하게 전하며, 특히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을 시대적 배경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들이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캐릭터들의 상황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듭니다.
다만 ‘괴이’라는 키워드는 다소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점이 오히려 좋았지만, 본격적인 괴이물 혹은 호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 중후반에 발생하는 밀실 살인사건은 흥미롭게 전개되며 독자의 집중력을 끌어당깁니다.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청바지의 청년’과, 마지막에 한자 해석을 통해 풀어내는 트릭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받아들여야 할 아쉬움이라 생각됩니다.
놀라웠던 점은, 일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옮긴이의 말에도 그 점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읽다 보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을, 그들은 그들 국민을 대상으로도 스스럼없이 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우리 역시 ‘양공주’라는 이름의 성매매 시스템을 오랫동안 용인했다는 뼈아픈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탄광과 등대에 이어 도쿄의 암시장을 경험한 하야타는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가가 이미 새로운 무대를 낙점했다고 하니 곧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가 우리에게 도착할 듯하다.
- 옮긴이의 말
▼ 가족과 사회, 정의의 의미를 묻는 작품으로, 일본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방황하는 칼날』리뷰보기
▷ 히가시노 게이고 <방황하는 칼날> 소설과 영화, 같은 칼 다른 울림
『붉은 옷의 어둠』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단순한 귀신 이야기보다 정교한 구성의 소설을 원하는 분
- 괴담과 본격 추리를 동시에 즐기고 싶은 분
- ‘일상의 뒤편에 숨겨진 기이한 세계’에 매력을 느끼는 분
전후 혼란과 상처를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붉은 옷의 어둠》은, 역사 속 그늘진 진실을 가감 없이 그려낸 작품입니다. 깊이 있는 고증과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며,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통찰력 있게 드러냅니다. 시대의 아픔과 사람들의 삶이 절절히 느껴지는 소설로, 역사와 사회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