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을 읽으며 탐정이 된 기분이 들지 않으세요?
작가가 숨겨놓은 단서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범인을 추리하는 그 과정이 정말 짜릿한데요. 사실 이런 추리소설에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칙, 일종의 '공정한 게임'이 숨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침이 바로 1920년대에 등장한 '반 다인의 추리소설 20칙'입니다.
추리소설의 숨겨진 약속, 반 다인의 20칙
S.S. 반 다인(S.S. Van Dine)은 미국의 소설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Willard Huntington Wright)의 필명입니다. 1928년에 《아메리칸 매거진》에 발표한 '추리소설 20칙'은 당시 추리소설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규칙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범인을 추리하며 얻는 재미를 최대한 보장하고, 작가가 독자를 속이는 불공정한 플레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반 다인의 추리소설 20칙 전문
- 독자는 범인을 추리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제공받아야 한다.
-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 위해 트릭이나 속임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추리소설에는 사랑 이야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 탐정 자신이나 수사 당국의 직원이 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범인은 논리적인 추리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 탐정소설에는 탐정이 있어야 하고, 탐정은 탐정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 추리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있어야 한다.
- 범죄의 수수께끼는 엄격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풀어져야 한다.
- 탐정, 즉 추리의 주역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 범인은 소설 중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 작가는 심부름이나 하는 하인을 범인으로 해서는 안 된다.
- 범죄가 있든 없든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 비밀결사, 카모라당, 마피아당 등을 탐정소설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 살인방법과 이에 대한 수사방법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 사건의 진상은 통찰력 있는 독자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 되어야 한다.
- 장황한 서술적 묘사, 지엽적인 일에 관한 문학적인 설명, 정교한 성격분석, 분위기에 대한 도취 등을 해서는 안 된다.
- 탐정소설에서는 직업적 범죄자가 범인인 것은 좋지 않다.
- 사고 또는 자살이었다고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 탐정소설에서 살인의 동기는 모두가 개인적인 것이라야 한다.
- 끝으로 나의 신조를 20항으로 끝내기 위하여 자존심이 없는 작가라면 써 먹을지도 모르는 수법을 열거하려 한다.
이 규칙들은 당시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이끄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가들이 이 틀 안에서 얼마나 기발한 트릭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공정한 단서 제공(Fair Play)'이 왜 중요할까요?
반 다인의 20칙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개념이 바로 '공정한 단서 제공(Fair Play)'입니다. 이건 마치 스포츠 경기의 규칙처럼,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약속 같은 겁니다.
독자가 탐정이 되는 즐거움: 이 원칙 덕분에 독자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읽는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이 셜록 홈즈라도 된 것처럼 사건의 단서를 쫓고 범인을 추리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추리한 범인이 실제로 맞았을 때의 그 희열은 추리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탄탄한 논리: 작가는 공정한 단서 제공을 위해 이야기에 빈틈이 없도록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모든 단서가 합리적으로 연결되고,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덕분에 추리소설은 더욱 탄탄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의 끈끈한 신뢰: 작가가 독자에게 공정한 규칙을 지킨다는 건, 독자와의 신뢰를 쌓는 것과 같아요. "이 작가는 나를 속이지 않아, 내가 충분히 추리할 수 있도록 모든 단서를 보여줄 거야!"라는 믿음이 생기면, 독자들은 그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되고,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애정도 깊어지게 됩니다.
규칙을 깬 작품: 논란 속에서 빛난 명작
반 다인의 20칙, 특히 '공정한 단서 제공' 원칙은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만들었지만, 어떤 작품들은 이 규칙을 과감하게 깨뜨리며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논란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 논란 덕분에 더 유명해지고 추리소설 장르의 지평을 넓힌 작품들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입니다.
이 작품은 서술 트릭의 대명사로 불리는데, 독자들이 믿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사실은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죠. 당시에는 공정하지 않다는 비판도 많았지만, 지금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때로는 배신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의 기발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물론 시대가 변하며 반 다인의 추리소설 20칙은 어찌 보면 낡은 규칙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공정한 단서 제공'이라는 그 정신만큼은 여전히 많은 추리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독자와 작가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