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심리 스릴러의 독보적 존재인 서미애 작가의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전작 『잘 자요, 엄마』 이후 5년이 흐른 시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비밀'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긴장감과 감춰진 진실을 좇는 서사는, 단순한 범죄 추리를 넘어 인간 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듭니다.
아쉽게도 전작 『잘 자요, 엄마』를 읽지 못한 상태로 이 작품을 접했습니다.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더욱 깊이 있는 서사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전작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났고, 만약 새로 이 작품을 시작하는 독자라면 두 작품을 함께 읽는다면 작가님이 구축한 세계관과 인물들의 관계, 특히 주인공 하영의 과거 트라우마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특히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인물의 심리 묘사와 범죄자의 내면 탐구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범죄자의 마음을 분석해 온 권일용 프로파일러조차 "가장 들여다보고 싶은 인물이 이 소설에 있다"고 평했을 정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의 틀을 넘어,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인간 본연의 어둠과 비밀이 만들어내는 비극에 대해 성찰하게 만듭니다.
작품소개
열일곱, 살인은 충분히 경험했다.
연쇄살인범 이병도와의 사건이 벌어진 지 5년.
열여섯 살이 된 하영은 지속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으며 그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사춘기에 접어든데다 예기치 않은 이사까지 겹쳐 예민해진 하영은
전학 간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자신의 그림자와 직면하게 된 하영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 것인가?
책 속에 서술된 문구는 전작 『잘 자요, 엄마』 후속작이란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전작의 흐름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영'과 연쇄살인범 이병도의 이야기는 자세히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 트라우마가 될 힘든 일을 겪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유리의 죽음이 남긴 것들
소설은 중학생 유리의 가출로 시작됩니다.
"너만 없으면 어디든 갈 텐데, 네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알어?"
소설 속 문장은 상황을 이해하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인물의 절규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주변 어딘가에 있을법한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너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진심이 아닌 말로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원했던 대로 상대가 사라져 주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학교폭력을 피해 도망치던 유리는 결국 친구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가해 학생들의 반응입니다.
모든 게 그 기집애 때문이야. 망할 기집애, 겨우 발길질 몇대였을 뿐인데 왜 죽어버린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대사에서 드러나듯, 살인이라는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그들에게는 큰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저 상황을 상대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독자에게 당혹감과 함께 깊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죄의식 자체가 부재한 그들의 모습은 소설이 파헤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영, 트라우마를 안고 성장하는 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림자는 발에서 떨어지지 않아"
과거의 그림자는 하영을 계속 따라다닙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 온 하영은 유리의 책상에 앉아 괴롭힘의 흔적들을 보게 됩니다. 하영은 가끔 섬뜩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겪은 사건들로 인해 큰 아픔을 간직한 소녀입니다. 그녀는 정의롭거나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자신의 처지와 경험으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하영은 유리의 아픔을 느끼고,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안에서 무너지는 마음
하영의 새엄마 선경은 흉악범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범죄심리학자입니다. 하영의 과거를 알고 있는 선경은 하영의 마음속 아픔을 풀어주고자 하지만, 정작 마음적으로 깊이 다가가지 못하고, 남편의 가스라이팅에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타인의 삶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로서의 모습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개인으로서의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은밀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서로를 보살펴야 할 가족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비밀을 쌓아가는 모습은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는지도 모른 채 길들여지는 세상속에서는 순간순간 섬뜩함을 보여주는 하영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이러한 부조리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이야기, 그럼에도 남은 희망
소설은 모든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는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계속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함을 보여주며 현실적인 여운을 남깁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영과 선경,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 속 하영은 어린 시절의 사건들로 인해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고 자신의 방법으로 함께하려 하며, 특히 자신의 여동생을 지켜주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합니다. 하영과 선경이 끝까지 올바른 선택으로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잘 헤쳐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 우리가 외면한 진실
리뷰를 마무리하며, 유리가 사진 뒷면에 써놓은 글귀가 가슴에 깊이 박힙니다.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사흘이 지나도 엄마는 알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데, 내가 안 보이나 보다.
엄마에게 나는 없는가 보다.
엄마와 함께 ♥
이 짧은 글은 가족 안에서의 무관심과 소통 부재가 한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범인을 찾는 추리 소설을 넘어섭니다. 각 인물이 숨기고 있는 비밀, 그 비밀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균열,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 본성의 복잡성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을 따라가며, 과연 '비밀'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님 특유의 흡인력 있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소비되는 슬픔이 되어버린 학교폭력
최근 『피라미드 게임』, 『스터디그룹』, 『약한영웅』, 『하이스쿨 히어로즈』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때때로 자극적인 흥미 요소로만 소비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들기도 합니다.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이러한 현실 속 학교 폭력의 잔혹성과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며, 독자에게 단순히 재미를 넘어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 깊은 울림을 남기다
결론적으로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서미애 작가님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수작입니다. 전작과의 연결성을 통해 팬들에게는 반가움을,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비밀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탐구하며, 잘 짜인 미스터리 서사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 소설은 추리 소설, 특히 사회파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심리 스릴러 및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분
- 깊이 있는 캐릭터 분석을 줄기는 분
- 학교 폭력, 가족 문제 등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관심있는 분
-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
모든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고 현실적인 결말을 맺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을 덮은 후에도 그들의 선태과 그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묵직한 메시지와 여운을 느껴 보기에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소설을 읽고 그저 막연하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희망의 끈』 이라는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희망의 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