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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한국소설

정유정 『종의 기원』 인간 악의 심연을 직시하다 - 악의 3부작

by handrami 2025. 9. 4.

정유정 작가는 한국 문단에서 '''인간 본성'이라는 주제를 가장 치열하게 탐구하는 작가로 손꼽힙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범죄 사건을 쫓는 추리 소설의 범주를 넘어,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과 욕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정유정 '종의 기원' 책표지 편집한 이미지
2016년 정유정 출판 은행나무

정유정, 악의 3부작을 완성하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7년의 밤, 28, 그리고 종의 기원은 종종 '악의 3부작'으로 함께 불립니다. 이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으며, 작가가 인간 본성 속에 내재된 악의 근원과 발현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자연스럽게 붙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소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악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과 악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 악이 타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서막, 한유진의 악몽

극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을 압도해온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종의 기원입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연상시키며, '악은 과연 진화의 결과물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집니다.

 

소설은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 한유진이 피로 얼룩진 자신의 집과 거실에서 피투성이 시체를 발견하며 시작됩니다. 전날 밤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짐승의 피처럼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은 그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한유진은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직감에 사로잡힌 채, 사라진 기억과 함께 사건의 진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어제의 기억을 더듬고 집안 곳곳을 뒤지며 마주하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들은 한유진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이 과정에서 한유진의 유년 시절의 상처와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들까지 드러나며, 소설은 단순한 살인 사건을 넘어 한 개인의 성장과정을 통한 악의 발현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봅니다.

 

범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악: 불편하고 힘겨운 몰입

종의 기원은 작가도 언급했듯이 즐기며 읽기에는 불편한 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 한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는 그의 심리와 감각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됩니다. 그의 불안한 숨소리, 격렬한 심장 박동, 미세한 손 떨림까지 너무나 디테일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독자는 한유진의 혼란과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이러한 몰입감은 때로는 숨이 막히고 마음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근원적인 악'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이 악인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려낸다면, 종의 기원은 그 악의 '내부'로 들어가 독자가 직접 숨을 쉬게 만듭니다. 한유진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포식자'라는 높은 단계의 진단을 받은 인물로, 그는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원인을 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살인범들이 죽음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저에게는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답답하고 힘든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처럼 독자가 탐정이 되어 범인을 추리하고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저는 처음부터 '범죄자의 마음' 안에 갇혀 그의 왜곡된 논리와 감각을 고스란히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엿보며,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심리에 저 자신이 깊이 빠져드는 경험은 불편함을 넘어선 일종의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작가 정유정, ''에 집착하는 이유

1994년 박한상 사건 신문기사 일부
1994년 박한상 사건 신문기사 일부

 

정유정 작가가 왜 그토록 인간의 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1994년에 발생한 '박한상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작가 스스로 언급합니다. 이 사건은 백억 자산가의 아들인 박한상이 부모를 살해하고 방화를 시도했음에도 죄책감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작가는 당시 간호사로 일하며 이 사건을 접하고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정유정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 유진과 같은 사이코패스에 대해 "감정과 도덕을 관장하는 전두엽에 불이 안 들어오는 별종"이라고 표현했으며,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하여 종의 기원을 쓰기 위해 "2년간 사이코패스로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철저하게 캐릭터와 사건에 몰입하여 그들의 내면을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작가페이지 및 책 일부
작가및 책 내용 中

 

소설에 등장하는 "웃기지 마,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야." (p374)라는 대사는 한유진의 냉혹한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작가는 프로이트의 이론 중에서 미약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밝힙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p380)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인간의 ''이 단순히 학습되거나 외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적인 것일 수 있다는 질문을 던집니다. 작가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을 인용,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고 언급하며, 이는 물리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의 진화적 성공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소설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대목으로, 작가가 종의 기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의 기원불편함을 통한 깊은 성찰

종의 기원은 인간의 존엄성과 악의 윤리적 경계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한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편적인 교육과 사회화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즉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뉴스나 기사를 통해 접했던 잔혹한 사건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사의 어두운 면들을 작가는 매우 생생하게 펼쳐 보이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당신은 무해한 존재인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죽여'나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을 말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은 인간의 악에 대한 섬세하고 치열한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강력히 추천드리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섬뜩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독서 경험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종의 기원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종의 기원은 그 내용의 특성상 모든 독자에게 편안하게 다가서기보다는, 특정 독자층에게 더욱 깊은 울림과 강렬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 심리 스릴러 및 다크 픽션을 선호하시는 분: 정유정 작가 특유의 밀도 높은 심리 묘사와 숨 막히는 긴장감을 통해 독자의 심연을 파고드는 이야기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이 작품에 깊이 몰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사건 해결을 넘어, 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탐구하는 서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 인간 본성 및 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인간 본성이 얼마나 잔인하고 복잡한지를 깊이 탐구하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작품은 강력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히 '사이코패스'의 내면세계를 1인칭 시점으로 직접 경험해보고자 하는 분이라면 큰 흥미를 느끼실 것입니다.
  • 도전적이고 사색적인 독서를 즐기시는 분: 단순히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가벼운 독서보다는, 독서 후에도 오랫동안 곱씹고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독자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사회적 금기나 어두운 주제를 심도 있게 파고드는 작품을 통해 지적인 자극을 얻고자 하는 분들께 이상적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기존 작품에 매력을 느낀 분에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저도 여기에 속해서 이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 7년의 밤 』 28을 재미있게 읽고 악의 3부작이라는『종의 기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물론, 작가 특유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흡인력 있는 문체는종의 기원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앞선 두 작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 본성의 악, 특히 그 '근원'을 훨씬 더 깊고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이처럼 종의 기원은 독특한 흡입력을 지녔지만, 내용 자체가 매우 어둡고 불편할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 강한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잔혹하거나 현실에 깊이 개입하는 악의 묘사에 익숙지 않은 독자분들께는 독서 과정이 다소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으므로,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시고 읽기를 시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종의 기원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직시하고, 불편할지라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을 얻고자 하는 독자분들께 특히 권해드립니다.

정유정 작가의 악의 3부작 리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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