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8』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가상 도시 화양시에서 발생한 전염병의 지속 기간인 '28일'을 의미합니다. 이 소설은 전염병 통제라는 명목 아래 28일 동안 고립된 화양시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이야기와 그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따라서 제목 '28'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을 넘어,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소개
이야기의 시작과 인간적인 선택
소설은 프롤로그에서 수의사 서재형의 이야기로 독자를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최후의 위대한 레이스'라 불리는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에서 사고로 개들을 모두 잃고 구조되는 재형의 이야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특히 자신을 구하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난 썰매개 마야와, 사고 당시 개들을 희생시켜 자신만이라도 살고 싶었던 그의 솔직한 속마음은 독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재형은 사고 이후 "대장, 내 아이들은 어쨌어?"라는 마야의 환청에 시달리며 개들에 대한 미안함을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훗날 김윤주 기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늑대들을 끌고 달아나주기를 바랐어. 되도록 멀리. 기왕이면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치면서 한 마리씩 차례차례, 모조리 잡아먹히기를 바랐어. 배가 덜 찬 늑대들이 나를 기억해내고 되돌아오지 않도록.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p.448)
이 부분은 극한 상황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이자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비난하기 어려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아이디타로드 경주의 아이러니와 동물 윤리
《아이디타로드 경주》는 1925년 악성 디프테리아로부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혈청을 운반했던 용감한 개 썰매꾼들을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숭고한 목적과 달리, 이 경주 과정에서 많은 개들이 고통받고 죽거나 다치며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개썰매 경주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은 이후 화양시에서 벌어지는 개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장면등 더한 잔인성으로 인해 큰 문제로 부각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얼마나 쉽게 동물을 희생양 삼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은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소설은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극한 상황이나 인간의 욕망 앞에서 동물이 겪게 되는 고통과 인간의 잔혹성을 고발하며, 인간과 동물의 윤리적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비판적인 성찰을 유도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5+1의 다중 시점
■ 서재형
자신이 사랑하던 개들을 개썰매 경주로 잃은 트라우마를 간직한 체 살아가던 어느 날 김윤주 기자의 '수의사 같았는데 알고 보니 개장수'라는 기사로 인해 비난과 지탄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 김윤주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은 자료를 근거로 재형의 비난 기사를 써서 재형을 난처하게 만든 기자
뒤늦게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 의문점이 들어 확인하기 위해 재형을 찾아 드림랜드를 방문합니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안 돼. 등을 보이고 달아나서도 안 돼. 비록 훌륭한 엉덩이는 아니지만 물어뜯겨 짝짝이가 되면 곤란하다고. (p.79)
소설을 읽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글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이 문장을 통해 정유정 작가의 특유의 감각적인 유머를 미리 엿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과 진실이 다를 때, 사실만을 전달한 기자는 과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 박동해
군대에서 개를 잔인하게 죽인 과거가 있는 인물로, 화양 동부소방서의 공익요원입니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형 악인으로,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불편함과 혐오감을 유발합니다.
■ 한기준
화양 동부소방서 119구조대원으로, 전염병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물에게는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 노수진
화양의료원 응급실 간호사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비운의 인물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의료진의 헌신을 경험한 우리에게 수진의 모습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 링고
투견장에서 살아남은 늑대 혈통의 개입니다. 인간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링고는 힘없이 희생되는 동물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인간의 잔혹성에 맞서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인간은 복수해도 되고 동물은 안 되는지 묻는 듯합니다.
현실과 맞닿은 비극, 그리고 질문
소설 『28』은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소설 속 '빨간 눈 괴질'과 화양시의 상황은 '코로나'를 겪은 우리에게 더욱더 현실적이고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무능한 정부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증오의 대상을 만들고, 은밀한 발포와 처리를 자행하며,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빨간 눈의 원흉이 개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들리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개에게'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개 한 마리가 수백 명의 사람에게'를 부각시킨 탓이었다. '살처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생략이요, 과장이었다. (p.276)
'유기견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개를 향해 총을 쏴댔다.
풍문에 의하면, 산골짜기 총성은 야음을 타 화양을 탈출하려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며칠 새에 수십 명이 죽어 암매장당했다고 했다. (p.364)
봉쇄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과 비극을 암시합니다.
봉쇄당한 화양시는 점차 이성을 잃고 서로를 공격하며 분노하고 절망하는 지옥으로 변해갑니다. 소설은 이러한 극한 상황을 통해 인간 사회의 취약성과 공멸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공생'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28'과 '제노사이드' 인간 본성의 잔혹성과 생명의 가치
정유정 작가는 소설 '28'의 '작가의 말'을 통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며, "종의 다름이 인간과 동물의 취급 차이를 정당화할 수단이 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독자에게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를 넘어선 생명 존중의 가치를 환기시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노사이드'가 철저한 배경지식과 디테일한 설정으로 생존의 윤리를 파고든다면, '28'은 바이러스라는 대재앙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생명의 본질적인 가치를 묻습니다. 특히,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같은 종에게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섬뜩한 통찰처럼, 두 작품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드러내는 '잔학성'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28' 속에서 질서가 무너진 화양시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이기심과 폭력은, '제노사이드'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종말'로 이끌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작가는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면 반려동물에게도, 심지어 인간에게도 가축에게 했던 '생매장'과 같은 '짓'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가축보다 반려동물이, 반려동물보다 인간에게 행해지기까지 결심의 무게가 좀 더 클 뿐이라고 말하며, 인간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잔혹한 본성을 두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파헤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작가는 저 반대편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못합니다. 이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불씨를 찾으려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작가는 무책임한 정부가 제시한 가장 쉬운 방법인 '봉쇄'라는 조치를, 봉쇄 바깥에 있는 우리가 과연 대놓고 반대할 수 있을지 묻습니다. 이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직접 겪지 않은 바깥의 사람들이 그저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을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제노사이드』리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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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지 못했던 최선
서재형은 11년 전 썰매견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유기견을 돌보며 속죄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는, 그때 하지 못했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1년 전 재형의 선택을 비난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게 나름의 속죄의 길을 걷던 재형은 김윤주 기자의 섣부른 기사 한 줄로 인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인수공통전염병이 분명하다'는 기사는 무책임한 정부가 화양시에서 개들을 합법적으로 학살해도 좋다는 신호탄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살처분 당하는 개들의 애처로운 눈빛에서 "살려주세요"라는 비명을 듣는 재형의 모습은, 전염병으로 고립된 화양 시민들의 "살려주세요"라는 외침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인간을 넘어 '생명'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헌신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최악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악마 같은 존재들도 있다는 생각 또한 떨칠 수 없습니다. 소설은 이 모든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 채, 독자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묻는 듯 "대장, 내 아이들은 어쨌어?"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며 끝을 맺습니다.
『28』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
-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소설에 관심있는 분
- 동물 윤리 및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분
- 정유정 작가의 ‘악의 3부작’ 또는 다른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분
『28』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인간 본성과 사회 시스템의 취약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전염병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인간 내면에 숨겨진 어둠과 빛을 동시에 보여주며, 독자에게 '당신은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다소 충격적이고 잔혹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인간 본성, 사회 문제, 그리고 재난 상황 속 심리 변화에 관심 있는 독자분들께 정유정 작가님의 『28』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분명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할지라도,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깊은 여운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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