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Review

정혁용 <침입자들> 일상 속 침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침입자였다

by handrami 2025. 5. 19.

전통적인 의미의 추리소설에는 속하지 않지만,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사회파 하드보일드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미스터리와 긴장감이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침입자들은 단순한 외부 침입이 아니라, 사회, 관계, 기억, 감정 등 삶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혁용 '침입자들' 책표지 직접편집한 이미지
Copyright ⓒ 2020 정혁용 출판:다산북스

작품소개

누구나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지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며,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서 후회하거나 의도치 않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 <칼리토>의 대사가 소설 첫머리에 나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 전개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사람의 인생 경로에 대한 이야기임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서울에 막 상경한 마흔다섯의 사내는 택배기사 일을 하게 됩니다.

그가 활동하는 지역을 따서 행운동이라 불리게 됩니다.

소설은 그가 택배일을 하며 만나는 인물들과 얽히게 되고 그들과의 만남을 단편처럼 이야기합니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이름이나 과거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을 줍니다.

다만 그의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과 이전에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만 들고 마무리됩니다.

 

추리적 분위기를 느낀 이유

  • 정체를 숨긴 인물들
  • 비밀스러운 과거와 단서들
  • 등장인물 간의 진실게임
  •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전개

 

침입자들이라는 제목이 주는 의미

주인공 행운동은 택배기사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집 문 앞까지 접근하고, 어떤 경우는 문 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택배기사는 공간의 침입 일상의 경계에 들어서는 존재로 환영받는 방문자이자, 동시에 사적 공간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침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의 삶에 조금씩 들어가기도 하고, 망가뜨리고, 흔들며, 침범합니다.

결국, 모두가 서로에게 침입자가 되는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수퍼리얼리즘 이라고도 하며, 리얼리즘 이상의 리얼리즘을 뜻합니다.

극사실주의를 기반으로 발전된 개념으로 모방을 넘어, 감정, 주제의식, 사회적 메시지까지도 담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더해 현실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묘사를 하기도 합니다.

극사실주의보다 더 철학적, 비판적, 감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침입자들 이야기속의 하이퍼리얼리즘의 거론은 아마도 이 소설 역시 현실을 사진처럼 담담히 복제하지 않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자 한다는 자기 선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현실을 진짜처럼 이야기한다는 뜻보다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묘사하려고 한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행운동에 대한 정보의 부재

주인공은 택배기사라는 직업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집에 침입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익명의 존재로서의 현대인, 또는 도시의 기능적 인간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입니다.

사회 속에서 기능은 있지만 개인은 지워진 얼굴 없는 존재.

타인의 삶을 배달하지만 자신의 삶은 비어 있는 존재

그런 면에서 독자는 그를 하나의 인물에서 모두의 대변자로 그의 시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개인의 고유성보다 사회 구조 속 익명성, 침입자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존재라는 전략은 작품의 리얼리즘과 사회 비판성을 더 날카롭게 만드는 효과를 줍니다.

 

주인공 행운동은 타인의 삶을 동정하지도,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날카로운 언어로 그들을 해부하듯 바라보며 때로는 불편해할 말을 서슴치않고 내뱉어 버립니다.

그의 능력은 때로는 관찰카메라처럼 차갑고 정확합니다.

관찰하되 개입하지 않는 자, 존재하지만 투명한 자, 타인의 진실을 읽어 내지만 자기 정체는 감춘자라는 철저히 현대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로 작가가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얼굴 없는 초상일 수도 있습니다.

 

 

침입자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김언수 작가의『설계자들』이나 조완선 작가의『집행관들』을 떠올렸고, 그런 류의 소설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이 다른 하드보일드한 소설이었습니다.

읽기 시작한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며 뭔가 다름을 느꼈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 있었고 다른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 한국적 하드보일드 작품 리뷰보기

<설계자들> 김언수 - 다음 생을 위한 마지막 설계

▷ <집행관들> 조완선 - 집행은 멈추지 않는다

 

 

나에게 의미 있는 문장 수집

바닥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지.
내 것이긴 하지만 이놈의 자존심은 자주 내 발목을 잡는다.
사랑이 왜 변해? 사람이 변하지.
갑도 을도 아닌, 병이 정에게 갑질을 하는.

 

 

침입자들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일상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탐색하고 싶은 분
  •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하드보일드 장르에 관심이 있으신 분
  •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인간관계와 사회 구조를 성찰하고자 하는 분

일상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며, 작가의 섬세한 문체와 주인공 행운동이 내뱉는 까칠한 대사는 시원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총격전이나 탐정은 없지만 인간 군상의 타락, 익명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의 무표정한 시선, 그리고 건조한 문체를 통해서 한국적 하드보일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