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으로 단순히 범인 찾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내면에 숨겨진 ‘악의’라는 감정의 근원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심리 추리극입니다.
이 작품은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1996년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どちらかが彼女を殺した)』와 같은 해 출간되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1986년부터 2023년까지 총 11권이 발표되었으며, 『악의』는 시리즈 출간 10년 차에 발표된 작품으로 가가 교이치로가 교사에서 형사의 길을 택하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가 교이치로, 왜 교단에서 형사가 되었는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가 교이치로 형사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가가는 수사관으로서 타고난 재능을 가졌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형사여서 가정이 소홀해졌다고 느꼈습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형사가 아닌 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폭력 사건에 개입하면서 그는 교사로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피해 학생조차 가가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이라고 표현했고, 가해 학생들은 "졸업 전까지 잔소리 많은 가가 선생 때문에 폭력을 꾹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p.358/p.359)
이러한 학생들의 반응은 가가의 개입이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일시적인 억제에 그쳤으며, 그의 노력이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함이나 반감으로 다가왔음을 시사합니다. 이 쓰라린 경험은 그에게 교사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했고, 결국 타고난 수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형사의 길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과거는 작품 속에서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그의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왜'라는 질문의 무게
'악의'가 다른 추리소설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서사 구조로 '왜'에 집중합니다. 소설은 유명 작가인 히다카 구니히코의 살해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특이하게도 소설 초반에 범인의 정체와 살해 방식이 드러납니다.
가가 형사는 범인이 남긴 수기 속 미묘한 모순과 함정을 파고들며, 심지어 범인 스스로가 남긴 기록에서 그의 거짓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냅니다.
가가 형사는 범인이 순순히 자백한 표면적인 동기 뒤에 숨겨진 진짜 '악의'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끈질긴 수사를 이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범인의 시점과 가가 형사의 시점을 오가며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됩니다.
악의'는 어디에서 오는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악의'는 이 작품의 핵심 주제입니다. 작가는 범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설명하기 어려운 순수한 악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극단적인 범죄로 이어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범행 동기를 밝히기 위한 가가 형사의 수사는 단순히 사건의 퍼즐을 맞추는 것을 넘어,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어둡고 비틀린 감정의 실체를 탐구하는 여정입니다.
소설은 범인의 일기 형식과 가가 형사의 수사 기록 형식을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범인의 시점에서 그의 과거와 히다카와의 관계, 그리고 범행에 이르게 된 과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가가 형사의 날카로운 시선과 집요한 추적을 통해 범인이 숨기려 했던 진실, 즉 그의 '악의'가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반전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왜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는지 깨닫게 합니다.
“그런 악의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p.395)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p.359/p.395)
가가형사의 독백 같은 질문은 소설 『악의』가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가가형사가 교사 시절 괴롭힘의 주모자였던 학생이 했던 이 사소하고 비합리적인 감정이 어떻게 그런 ‘악의’의 씨앗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범인의 범행 동기는 단순히 표면적인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깊은 열등감과 과거의 관계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감정들이 마음에 안든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악의로 표출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소설은 악의가 반드시 거창한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반감이나 비합리적인 감정이 이처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가가형사의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내 안의 사소한 반감들이 혹시 악의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성찰을 유도하며, 인간 본연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합니다.
진실을 찾는 자의 눈
가가 쿄이치로 형사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사건 해결사를 넘어섭니다. 그는 범인의 거짓된 진술과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인간 본연의 감정과 관계의 이면을 꿰뚫어 봅니다. 그의 수사는 논리적인 추론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가가 형사가 '왜'라는 질문에 집착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독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며, 그의 매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
'악의'는 범인이 누구인지 일찍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는 작가가 설정한 반전 장치와 함께,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우리 안에 잠재된 악의가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독자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악의’를 어떻게 정의하나요?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소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가가형사시리즈" 11편 정보 한눈에 보기
히가시노 게이고 가가형사 시리즈 11편 - 순서 & 한눈에 보기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중에서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활약하는 소설을 가가형사 시리즈로 분류하고 있다.가가형사 시리즈는 순서 없이 무작위로 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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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는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에 관심이 있는 분
- 전통적인 범인 찾기 추리소설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신분
- 치밀한 구성과 반전을 즐기는 분
- 생각할 문제를 주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이성적이고 잔혹한 동기, 즉 ‘악의’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두려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더불어 『악의』는 각자의 기록과 증언이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며 서사의 힘을 극대화합니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거짓의 탑이 무너지는 순간 마주하는 진실은, 당신의 추리소설 경험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악의’ 없이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악의』는 결국,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사소한 악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덮은 뒤에도 그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