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Review/한국소설

정대건 『급류』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하는 법

by handrami 2025. 11. 13.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이 문장은 급류가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강력한 위로이자, 거대한 삶의 급류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버텨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대건 급류 책표지 편집한 이미지
Copyright ⓒ 2022 정대건 출판 민음사

비극속,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

소설은 진평강 하류에서 서로 엉켜 있는 두 남녀의 시신이 발견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강렬한 도입부는 독자를 순식간에 물안개가 자욱한 가상의 도시 '진평'으로 끌어당깁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열일곱 살 동갑내기 '도담''해솔'이 있습니다. 소방관인 도담의 아버지와 도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해솔은 점점 도담에게 이끌립니다.

 

소방관인 아버지의 부재를 늘 두려워하는 도담의 불안한 마음은 "소방관 순직 사고가 있을 때마다 뉴스에서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담은 그게 꼭 자신에게 일어날 일인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불쑥 들이닥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는 내면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와 이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내일 눈을 떴을 때 내 기억이 이어질 거라고 믿을 수 있지?"라며 존재의 연속성마저 불안해하는 해솔은 도담과 마찬가지로 깊은 결핍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핍을 서로 알아본 두 소년 소녀는 조심스럽게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거대한 급류를 만납니다. 해솔의 엄마와 도담의 아빠가 얽힌 불륜, 그리고 이어진 비극적인 사고는 아이들의 세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립니다. "너를 미워하지 마라"는 할머니의 기도만이 위태로운 그들을 붙잡고 있을 뿐, 아이들은 죄책감과 깊은 상처를 안고 흩어지게 됩니다.

 

'급류'가 상징하는 것들

제목인 '급류'는 단순히 진평강의 거센 물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한 운명의 은유이자, 도담과 해솔이 저항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상징합니다. 또한 부모 세대가 저지른 과오가 자식 세대에게 덮쳐오는 거대한 사회적 압력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사람들이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이 사실은 "무모함과 닮았거나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 있다는 서늘한 통찰을 던집니다. 이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비극 이후, 스물하나에 재회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를 인용하며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라고 자조하던 그들은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는 '슬픔 중독'의 상태를 경계합니다.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해솔이 도담에게 건네는 이 대사는 거센 급류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이 소설이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강력한 위로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생동감을 지닌 그들의 대화는 소설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우리의 이야기'라는 실감을 더합니다.

 

잊혔거나 외면해왔던 이야기들의 생생한 전달

사고 이후 진평에서 헤어졌던 도담과 해솔이 스물하나에 다시 재회하면서, 같은 트라우마를 각기 다르게 이겨내고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룹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인물들이 겪는 상처와 혼란,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성장통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현실의 아픔과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현실이자 지난 시간의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급류는 특히 '가족의 문제와 그로 인한 통제 불능의 상황이 개인에게 지우는 무거운 짐'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삶의 방향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가치와 독자를 사유하게 하는 힘

급류의 핵심 메시지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이 누군가의 현실이며, 어쩌면 우리 모두의 지난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의 '급류'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고 어떤 선택을 하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얻게 되는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단순히 청소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겪는 구조적 모순과 인간 본연의 고뇌를 포괄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사회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데 큰 가치를 지닙니다. 단순히 문제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와 그들이 처한 환경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독자가 쉽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작가는 인물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과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하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청소년들의 생활 세계와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 문화적 맥락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현실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한 줄'과 같은 문장들입니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문장들은 독자의 사고를 멈추게 하고,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합니다. 이러한 문체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며, 독서 경험을 단순한 이야기 소비를 넘어선 사유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급류는 이처럼 뛰어난 문학적 완성도를 통해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지금 꼭 읽어야 할 작품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작품의 재미와 이 소설에 대한 평가

급류가 선사하는 '재미'는 오락적 즐거움과는 다소 결이 다릅니다. 이 작품은 서사 자체의 스릴보다는 인물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감정에 몰입하며,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충족감을 제공합니다. 독자들은 현실의 냉혹함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희망과 절망을 함께 느끼면서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거울처럼 활용하게 만듭니다.

 

살다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시련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저 휩쓸려 떠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헤엄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소설은 독자에게 지난 시간 속에서 가장 거셌던 급류를 생각하게 하고 사유하게 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전반적으로 무겁고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며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개인의 고뇌를 심도 있게 다루기 때문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독서 경험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작품이 다루는 사회 구조적 모순과 인간 내면의 갈등이 현실적으로 묘사되면서, 이야기의 전개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어 일부 독자들은 서사의 반전이나 신선한 충격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작품의 메시지가 다소 명확하여 독자 스스로 해석할 여지가 적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개별적인 성장이나 미묘한 심리 변화보다는 거대한 사회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 캐릭터의 입체적인 면모를 더욱 깊이 탐구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 이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지만, 때로는 그 충실함이 독자의 상상력이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