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당신이 알던 동화는 여기서 죽었습니다.
씨큐브 출판사의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 시리즈를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 리뷰에서 전체를 다루었다면 이 리뷰는 각 권의 전반적인 특징과 메시지를 살펴보는 한편, 그 안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몇 편의 단편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모든 수록작을 일일이 다루기보다는, 선별된 단편들을 통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와 인간 심리의 복잡성, 그리고 사회 비판적 요소를 더욱 심도 있게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수록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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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임금님》 광기의 군주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순수한 아이의 외침이 거대한 거짓을 무너뜨리고 권력의 허상을 드러낸다는 통쾌한 풍자 동화로 기억하겠죠. 하지만 만약, 그 아이의 외침이 비극의 시작이었다면 어떨까요? 진실을 말한 입이 꿰매지고, 그 몸이 차가운 마네킹이 되어 거추장스러운 권위의 옷을 입혀졌다면 말입니다.
작품속 '벌거벗은 임금님'은 바로 그러한 섬뜩한 상상력에서 출발합니다. 이 이야기는 임금의 허영심이 노출증과 편집증적인 광기로 변질되고,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최고의 옷"이라 착각하며 이를 부정하는 모든 이를 '마네킹'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독한 권력의 폭주를 그립니다. 팔다리 잘린 인간의 상체가 꼬챙이에 꿰인 채 임금의 옷을 입고 도열해 있는 모습은, 진실이 억압된 사회의 병든 단면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잔인한 묘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 극단적 잔혹성
진실을 말한 사람들을 마네킹으로 만드는 행위, 방부처리된 시체, 꼬챙이에 꿰인 인체 등의 묘사는 일반 성인소설에서 다루는 수위를 넘어섭니다. 이는 공포문학이나 스플래터 호러에 가까운 표현 방식입니다.
● 심리적 충격과 불편함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불편함과 충격을 주는 방식은 일반 성인소설보다는 실험적인 문학이나 심리 호러에 가깝습니다. 노출증적 광기에 사로잡힌 임금의 뒤틀린 내면, 그리고 공포 속에서 진실을 외면하며 생존을 택한 신하와 백성들의 비극적인 심리 상태를 면밀히 분석합니다. 인간 본연의 가장 어두운 충동과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 군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 사회적 메시지
진실을 말살하는 권력의 폭정이 어떻게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결국 사회 전체의 파멸을 불러오는지를 섬뜩하게 경고합니다. "옷이 있어야 위엄이 있고 예법이 있으며 권력이 나오는 것"이라는 이웃나라 국왕의 냉소적인 대사는, 허상에 기댄 권위가 얼마나 공허하며 그 종말이 얼마나 비참한지 통렬하게 보여주는 명대사입니다.
● 진실의 미스터리
명백한 거짓이 어떻게 지배적인 '진실'이 되고, 그 거짓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강요되는지 그 심리적 미스터리를 파고듭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일반적인 성인소설보다는 심리적 공포와 사회 비판이 결합된 "문학적 호러" 또는 "사회 비판적 잔혹 우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맞지만, 단순한 오락이나 일상적 이야기보다는 충격과 불편함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실험적인 문학에 더 가깝습니다.
잔혹하고 직접적인 묘사, 그리고 불편한 결말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내용에 민감하신 분들은 독서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동화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부수고 싶거나, 사회의 이면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작품을 찾는 분들께, 이 작품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하얀새》
하얀새 잔혹동화에 실린 이유 희망의 말살과 비인간적인 절망
잔혹동화 속 하얀새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원전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전의 요소들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지점에서 인간적인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하여 작품의 잔혹성을 극대화합니다. 이는 원전 동화가 주던 카타르시스를 제거하고, 더 깊은 절망과 비인간적인 현실을 독자에게 직면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구원의 부정과 절망의 심화
원전에서 셋째 딸은 언니들의 복수를 완수합니다. 비록 죽었지만 언니들의 존재는 복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결국 마법사가 죗값을 치르는 정의 구현의 형태로 귀결됩니다. 셋째 딸은 언니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독자에게 일정 부분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정의 실현의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잔혹동화 버전은 부모님은 언니들의 시신을 보고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마법사의 피조물"이며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 방의 문을 다시 잠근 채 그대로 나옵니다. 이는 언니들의 비인간적인 존재 상태를 인정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심지어 복수의 대상으로서의 가치조차 부정해 버리는 극도의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가치가 완전히 붕괴되는 지점입니다.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존재를 그저 '피조물'로 규정하며 외면하는 것은, 살해보다 더 가혹한 비인간적인 방치이자 절망입니다.
자연의 순리에 대한 질문과 인간성의 상실
부모가 언니들을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피조물'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히 잔혹한 살인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죽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상황을 보여주며,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현실을 묵인하고 수용하는 극도의 잔혹성을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하얀 새' 잔혹동화 버전은 원전의 권선징악적 틀을 해체하고, 주인공의 희망과 인간적 가치마저 박탈하는 극심한 절망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원전이 마법사를 물리치며 정의가 실현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면, 잔혹동화 버전은 언니들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더 큰 차원의 비극과 상실감을 남기며, 독자를 깊은 혼란과 고뇌 속으로 이끕니다.
존재론적 고립과 자기 부정
“그럼 그 사악한 마법사와 일을 치른 저도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것이군요.”
이 한 마디는 셋째 딸에게 가해진 최악의 비극입니다. 부모는 언니들의 비참한 상태를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피조물'이라 규정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셋째 딸은 마법사를 죽임으로써 언니들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부모의 이런 반응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고, 심지어 자신 또한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존재', 즉 언니들과 다름없는 비인간적인 존재로 낙인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마법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싸움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구원자가 아닌, 또 다른 '피조물'로 전락합니다.

구원의 좌절과 영원한 고통
막내딸은 부모님이 말릴 새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숲으로 사라졌다.
원전에서는 셋째 딸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마법사를 처단하며 해피 엔딩을 맞습니다. 하지만 잔혹동화 버전에서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가족의 부정 속에서 더 이상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그녀는 마법사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집이라는 가장 안전하고 따뜻해야 할 공간마저 상실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그 후 숲에는 피눈물을 흘리는 하얀 새가 들으면 누구든지 울게 만드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떠돌았다.
영원한 고통과 비극적인 슬픔 속에 갇힌 존재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피눈물'과 '구슬픈 울음소리'는 그녀의 내면이 얼마나 깊은 상처와 절망으로 가득 찼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셋째 딸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잃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복수와 생존의 결과로 얻은 것은 '숲을 떠도는 비극적인 하얀 새'의 존재뿐입니다.
'잔혹동화 하얀 새'는 "사악한 자를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더 깊은 내면의 상처와 존재론적 고립 속에서 영원한 비극을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두 권에 비해 더 많은 단편들을 소개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전체 소설의 길이가 짧은 특징을 가집니다.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 시리즈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를 보시려면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 당신이 알던 동화는 여기서 죽었습니다.
경고: 당신이 알던 동화는 여기서 죽었습니다.우리는 모두 순수한 동화 속 세상을 믿었습니다.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19금 꼬리표가 붙은 이 책을 집어 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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