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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기타 번역소설

피터 스완슨 『살려 마땅한 사람들』 예열만 30분, 폭주하는 노후 경유차의 섬뜩한 반격

by handrami 2026. 4. 5.

당신은 정말 살려 마땅한 사람입니까?

피터 스완슨의 전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 시작과 동시에 시속 200km로 내달리는 스포츠카였다면, 이번 신작은 솔직히 말해 '예열만 30분이 걸리는 낡은 경유차' 같았습니다.

피터 스완슨의 살려 마땅한 사람들 책 표지 편집한 이미지
Copyright ⓒ 2023 Peter Swanson ❘ 이동윤 역, 푸른숲

 

이 소설은 '1: 살인을 저지를 나이', '2: 세 번째 인물', '3: 더러운 일'로 나뉩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의 시점을 교차시키지만, 초반 전개는 지나치게 느릿하고 불친절합니다. 헨리 킴볼의 교사 시절 트라우마와 조앤의 과거사가 얽히는 과정은 밀도가 낮아 지루함마저 느껴질 정도입니다. 작가는 거대한 음모를 암시하지만, 독자의 갈증을 해소해주기보다 방치하는 쪽을 택합니다. 만약 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으려는 분이 있다면, 일단 2부까지만 버텨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작중 사설탐정 킴볼이 적은 리머릭 한 구절은 당시 제 심정을 정확히 대변했습니다.

"지루해 죽을 지경인 사설탐정 / 허구한 날 감시 중 / 술집에 모인 사람들 / 달리는 차량들 / 호기심보다는 차라리 관음증"

이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작가가 제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비웃는 듯해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초반 전개는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타인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엿보는 관음증적 피로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소설 내용을 AI를 이용해 구성해본 이미지
소설 내용을 연출한 장면과 릴리가 조앤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모습 시각화

비로소 시작되는 '악의 미학'

하지만 2부에 접어들어 '릴리'가 전면에 등장하고 킴볼이 사건의 본질에 다가서며, 이야기는 전작 특유의 서늘한 흡입력을 회복합니다. 사방에 흩뿌려졌던 지루한 파편들이 하나의 퍼즐로 맞춰지는 순간, 노후 경유차는 비로소 괴물 같은 엔진 소리를 내며 독자를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 독자를 지치게 만들면서도 끝내 책장 앞에 붙들어 매는 것 자체가 피터 스완슨이 부리는 가장 영악한 마법일지도 모릅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정교한 위장술

작가는 '조앤'을 평범한 악역보다 훨씬 서늘한 고기능 소시오패스로 묘사합니다. 어린 시절 정신과 의사가 가르친 '분노 다스리는 법'을 역이용해 '선량한 여자아이'로 보이게끔 자신을 설계한 대목이 압권입니다. 악의(惡意)는 교육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정교하게 박제될 뿐이라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각이 돋보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선한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판단하지만, 작가는 내면이 썩은 포식자일지라도 겉으로는 가장 다정한 이웃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당신 곁에서 미소 짓는 이가 정말 선인인지, 아니면 침대 밑 '분노 상자'를 숨겨둔 조앤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의 자기합리화, 그리고 릴리

전작의 주인공 릴리 역시 상식의 범주를 비웃는 자기합리화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살인 철학은 언뜻 정의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살인을 유희로 즐기는 소시오패스의 궤변일 뿐입니다. 작가는 죄책감에 허덕이는 '무능한 선인'보다, 죄책감을 상자에 처박아두고 세상을 비웃는 '유능한 악인'이 현실에서 얼마나 우위에 서 있는지를 조롱하듯 보여줍니다.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행위 자체가 살인이든 사랑이든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릴리의 냉소적인 시선을 통해 폭로합니다.

다 읽고 나면 밀려오는 찝찝한 의문

중반 이후의 폭발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서늘한 의문이 남습니다. 작가는 끝까지 묻습니다. 누가 살려 마땅한 사람인가? 아니, 애초에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할 자격이 인간에게 있기는 한가?

릴리와 조앤 같은 포식자들이 활개 치는 이 세계관은 불쾌할 정도로 현실적입니다. 내 곁의 누군가가 그들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소설이 끝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평단은 이 작품을 두고 '작가 스스로가 세운 높은 기준을 다시 한번 뛰어넘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이 작품의 진가는 세련된 기교보다, 지루할 정도의 예열을 견디게 만든 뒤 기어코 독자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그 영악한 '폭주'에 있습니다.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만큼이나, 독자의 인내심을 담보로 펼치는 이 위험한 도박이야말로 피터 스완슨이 가진 오만한 자신감의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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