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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히가시노 게이고 <성녀의 구제> 완벽한 계획, 그 뒤에 숨겨진 처절한 구제

by handrami 2025. 5. 24.

설명이 필요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며,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시리즈'로 치밀한 과학적 트릭과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결합한 작품입니다.

Copyright ⓒ 2008 Keigo Higashino / 발행: 11쇄 2018년 / 역: 김난주 / 출판사: 재인

작품소개

아이와 함께하는 가정이라는 '라이프 플랜'을 주장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요시다카의 등을 노려보며 아야네는 마음속으로 말을 건넵니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내 마음을 죽였어. 그러니까 당신도 죽어 줘야겠어. p12

 

소설은 시작 부분에 범인의 정체를 암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일정 부분에서는 사실상 범인을 보여주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되는 '범인의 정체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이 소설의 핵심 반전 요소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완전범죄가 가능했는가, 그리고 왜 그런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는가에 대한 해명과 감정의 흐름이, 이 작품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같은 갈릴레오 시리즈로 범인이 초반에 등장하고 그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던 용의자 X의 헌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아야네는 요시다카의 불륜상대인 히로미에게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부탁하며 열쇠를 맡깁니다. 모르는 척했지만 이후 알고 있었음을 진술합니다.

이때 이미 아야네는 앞으로의 진행을 예견하고 일을 꾸민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락이 안 되는 요시다카를 찾아 집으로 찾아간 히로미는 죽어있는 그를 발견합니다.

 

독극물인 아비산이 섞인 커피를 마시고 죽은 요시다카의 죽음을 젊은 여자 수사관 우쓰미 가오루, 구사나기형사, 그리고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사건에 접근합니다.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그녀를 용의자로 의심하는 형사, 용의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형사, 천재 물리학자는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가능성 없는 가설을 하나하나 제거하다 보면 단 하나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지. 하지만 가설을 세운 방식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면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p259

 

 

주요 관점

이 작품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입니다. 아야네는 남편의 일방적인 가치관에 의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존재가 됩니다. 이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여성을 존재로 보기보다, 기능으로 보는 시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성녀의 구제는 이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단순한 살인을 넘어 소설은 여성의 존엄성과 모욕, 그리고 성녀라는 이미지 속에 숨겨진 감정의 복합성을 그립니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갈릴레오 시리즈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사나기 형사의 감정선을 흥미롭게 그립니다. 그는 아야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며, 이 감정이 수사에 혼선을 주기도 합니다. 구사나기의 이런 모습은 유가와의 냉철한 태도와 대비되며, 과학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적인 접근과 논리적인 수사의 절묘한 충돌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난 이 방정식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허수해야."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지.“ p310

 

유가와가 증명하는 방법의 살인은 정말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실제 증명하고 밝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평범한 인간이라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일가 부심하고 노력했을 거야. 하지만 이번 사건의 범인은 그 반대였어. 죽이지 않기 위해 전력을 쏟은 거야. 이런 범인은 세상에 없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없을 거야.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p422

 

성녀의 구제의미와 아야네의 이중성

"준코에게 한 짓은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똑같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대로 지내도 좋았다. 아야네에게 결혼 생활이란 교수대에 오른 남편을 지속적으로 구제하는 나날인 셈이었다." p451

 

'성녀의 구제'라는 소설의 제목을 의미하는 고백이며, 아야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조건부 도덕성을 보여줍니다. 윤리적 책임이나 도의적 거리두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우선합니다. 일종의 심리적 타협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망하지만,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아야네의 감정은 고립된 상태로 사랑이 아닌 필요와 기대의 결합이었을 것을 보입니다.

윤리적 선을 넘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자신 만큼은 다르길 기대하는 스스로 만든 기만적 신념으로 보입니다. 도덕적 정당성보다 감정적 안전을 더 우선시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생존 본능이 아닐까 합니다.

 

아야네는 침착하고 지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결혼 역시 삶의 안정과 체계로 들어가는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쓸모없다고 대할 때 그녀의 감정도 무너지고 맙니다.

여성으로 사회와 남성 중심 가치관에 의해 거절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는 분노와 슬픔에 배신감을 느끼며 응징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성녀의 구제에서 성녀라는 표현은 단지 착하고 순결한 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고결하고 단아하고 침착하지만, 내면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무너진 존엄을 위해 응징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구제는 표면적으로는 죽이지 않으려는 노력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처절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시리즈 리뷰보기

히가시노 게이고 <예지몽> 과학으로 해석하는 오컬트 -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리뷰 – 헌신이라는 이름의 완전범죄

히가시노 게이고 <금단의 마술> - 갈릴레오 시리즈

 

성녀의 구제는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퍼즐 같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분
  • 트릭과 인간 심리가 모두 살아 있는 소설을 원하는 분
  • 갈릴레오 시리즈를 좋아하는 분

히가시노 게이고의 뛰어난 트릭 구성 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잘 짜인 미스터리를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완벽해 보이는 범죄 뒤에 숨겨진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기상천외한 트릭이 주는 지적 자극을 동시에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깊은 세계관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