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비정근( 非情勤 )』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학생 학습지에 연재된 작품을 대대적으로 가필 수정하여 출간된 문고판입니다. 돈은 못 벌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스터리 소설 집필 시간을 벌기 위해 기간제 교사를 택한 독특한 설정의 주인공이, 각 학교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쿨하고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낸 이색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은 이름 없이 나로 나오며 각각의 새로운 학교에 비상근(非常勤)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여 파견된 학교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을 해결하는 6편의 단편 형식의 쿨하고 하드보일드한 이색 미스터리와 초등학생 류타가 주인공인 히든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제1장 6X3
- 제2장 1/64
- 제3장 10X5X5+1
- 제4장 몰콘
- 제5장 무토타토
- 제6장 신의 물
- 히든트랙 – 류타 이야기
“설사 상대가 아이들이더라도 믿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의미 없이 믿는 척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에 좋아요. 정신 건강에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란다. 선생님도 인간이야. 나도 약하고, 너희들도 약해. 약한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
“사람이란 말이야. 당연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해.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사람을 좋아해서 얻는 건 많지만 싫어해서 얻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굳이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지.”
“더 큰 걸 생각해야지. 무조건 피하려 들면 안 돼. 도망쳐서 해결될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생명을 돌보려면 책임을 져야 해. 아이에게 밥만 주면 되지 더 필요한 게 뭐가 있겠냐고 하는 어른이 있다면 무책임하게 느껴지겠지?”
이처럼 『비정근』은 날카로운 통찰과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대사들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는 '인간드라마'와 '사회 비판적 시선'이 미스터리라는 장르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비정근』이라는 제목에 담긴 언어유희
학교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오해와 그로 인한 어긋난 관계들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비정근’은 일본어 발음상 ‘비정규직’과 ‘비정한 근무’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발음으로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품고 있는 제목입니다.
1. 한자 표기 그대로의 의미: 비정(非情)한 근무
非情勤 (ひじょうきん - Hijōkin)
非情勤은 '마음이 없는(비정한) 근무' 또는 '감정을 섞지 않는 근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주인공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특별한 사명감을 내세우지 않고, 마치 '비정하게'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주인공의 행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 의미: 비상근(非常勤) 교사 (비정규직)
非常勤 (ひじょうきん - Hijōkin): 같은 발음(Hijōkin)을 가지지만 한자가 다릅니다.
非常勤은 '상시 근무가 아닌', 즉 '비정규 근무'나 '임시 근무'를 의미합니다. 일본에서는 상근직이 아닌 교사를 '非常勤講師(히죠킨 코시)'라고 부르는데, 이는 '비상근 강사' 또는 '기간제 교사', 즉 '비정규직 교사'를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주인공이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 잠시 선택한 기간제(비상근) 교사'라는 비정규직(非常勤)의 현실적인 위치를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겉으로는 '교육에 대한 사명감 없이 비정하게(非情) 근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중적인 모습을 제목에 절묘하게 담아낸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유희는 "비정규직 교사가 과연 비정한 마음으로 근무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인공의 내면과 행동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이 점에서 『비정근』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주제와 주인공의 캐릭터를 응축하는 매우 뛰어난 작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와 메시지: 오해와 비극, 그리고 사회 비판적 시선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오해’와 ‘비극’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나의 작은 오해가 쌓여서 얼마나 끈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비정규직 교사라는 설정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 즉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안정성과 차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초등학교라는 배경적 특성상 젊은 세대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겪는 성장통, 꿈과 좌절,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갈등이 미스터리 속에 담겨 있습니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결국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정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살인 사건을 다루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 사회의 연약한 연결고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감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1. ‘비정(非情)'의 가면 속에 감춰진 진정한 '정(情)'의 역설
작품의 제목인 '비정근(非情勤)'은 말 그대로 '비정규직'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정(情) 없이 근무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나는 교육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이 없다"고 말하며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행동은 오히려 어떤 정교사보다 학생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합니다.
이는 겉으로는 무관심해 보이고 사명감이 없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내면에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강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입니다. 작가는 '비정한' 출발점에서 시작된 인물이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진정한 '정(情)'을 발견하고, 결국 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 내면의 성장과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2. 형식적 사명감에 대한 비판과 본질적 역할의 강조
히가시노 게이고는 종종 작품을 통해 사회의 위선이나 형식적인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던집니다. 주인공 '나'의 모습은 겉으로만 '훌륭한 교사'인 척하는 이들, 혹은 조직의 틀 안에서 형식적인 의무만을 다하는 이들과 대비됩니다. 주인공은 제도나 사명감이라는 명목에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편견 없이 상황을 직시하고, 학생들의 개별적인 문제에 순수하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이는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명감의 유무가 아니라, 학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동'에 있음을 강조하는 작가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비정근'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주인공에게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을지도 모릅니다.
3. '진정한 어른'의 표상
주인공은 처음에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사건을 마주하고 학생들과 교감하면서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현실에 부딪힙니다. "어떤 일이건 도망치면 안 돼. 도망쳐서 해결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라는 그의 대사는, 작은 오해와 무관심이 쌓여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려는 그의 태도를 대변합니다.
이는 젊은 독자들에게는 회색빛 현실 속에서도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며, 기성세대에게는 자신이 혹시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거울이 됩니다. 스스로 사명감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가 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결국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훌륭한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묵직하게 제시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세계 속 『비정근』의 위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세계 속에서 초기작인 『비정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자칫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몰입감 있게 마지막 장까지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후기 대작들처럼 정교하고 복합적인 트릭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에 깊이 집중하며, 단순한 범인 찾기를 넘어 '왜 그랬는가?'와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특유의 휴머니즘적 서술 방식의 근간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건의 진실과 그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나약함과 이기심,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이 이 초기작에서부터 단단히 뿌리내렸음을 의미합니다. 트릭의 치밀함보다는 인간 내면의 성찰과 사회 비판적 시선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비정근』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한 조각이 되는 작품입니다. 자칫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청춘 미스터리라는 틀 안에서, 비정규직 문제, 교육 현장의 현실, 그리고 인간관계의 비극성이라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입니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사소한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곱씹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비정근'이라는 이름표 뒤에 감춰진 역설적인 인간미와 본질적인 사명감을 통해, 겉치레보다는 진정한 행동의 가치를 강조하며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비정근』은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세계를 엿보고 싶은 분
- 인간 심리와 관계의 복합성에 집중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분
- 청춘 미스터리 또는 학원물을 좋아하는 독자
- 진정한 어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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