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그따위 눈으로 쳐다보면 눈알을 뽑아버리고 불알도 뽑아버린다."
우포도청 소속 다모 박순애의 서늘한 경고는 시작부터 강렬하게 독자의 뇌리에 박힙니다. '다모'라는 이름이 이토록 선명하게 머리에 각인된 것은 2003년 이서진, 하지원, 김민준 주연의 드라마 <다모> 덕분일 겁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주옥같은 대사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조선시대 여성 수사관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그 시절, 우리는 '다모'라는 존재에 열광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명섭 작가의 『규방 부인 정탐기』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다모'의 세계를 더욱 깊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탐색하게 합니다.

사라진 신부 : 가려진 욕망과 조작된 운명
힘들게 혼인에 성공한 새색시가 정작 남편 곁을 떠나 한양에 남으려 했고, 심지어 몸종도, 패물도 챙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필사적인 결혼 노력과 그 이후의 의뭉스러운 행동들 사이에서, 대체 이 신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증에 손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박순애는 수십년 동안 우포도청의 관노이자 다모로 일했고 자신을 다모로 추천하고 조련했던, 지금은 환갑이 넘어 관노에서 면천되어 평민이 된 노파를 찾아 도움을 받게 됩니다.
조선 여성들의 은밀한 지성,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
노파의 소개로 용산 별영창 옆 절벽에 자리한 삼호정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박순애는 김금원, 박죽서, 이운초, 임혜랑이라는 네 명의 여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삼호정시사’라는 모임을 만든 조선시대 실존인물을 모티브로한 역사적 인물로 설정된 특별한 모임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단순한 문학 모임이 아니라, 당시 조선 시대의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자신만의 지성과 재능을 꽃피웠던 실존 인물들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입니다.(실제 기록에서는 김금원, 박죽서, 김운초, 경산, 경춘으로 언급됩니다)
특히 김금원의 존재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불과 14세의 나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했으며, 30대가 되어서는 용산의 삼호정에서 여성들만의 시회를 열었던 그녀. 김금원은 조선 시대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문학적 재능을 마음껏 펼쳤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시 한 구절 한 구절에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영혼과 섬세한 관찰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실제로 인용된 시들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내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김금원이 옥순봉을 유람하고 지은 시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 詩家風月暫無閒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 造物猜人送出山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 山鳥不知山外事
봄빛은 숲 속에 있다고 지저귀네. 謂言春色在林間
이 시는 그녀의 호방한 기개와 자연을 향한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박죽서의 '만춘'
꽃이 지는 봄은 첫 가을과 같네. 落花天氣似新秋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맑게 흐르네. 夜靜銀河淡欲流
한 많은 몸은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 却恨此身不如雁
몇 년 동안 고향 땅 원주에 가지 못하고 있네. 年年未得到原州
또한 박죽서의 '만춘'이라는 시에서는 늦은 봄의 쓸쓸함 속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작가는 이처럼 실존 인물들의 실제 시를 작품 속에 배치하여 이야기의 깊이와 사실성을 더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시대상과 여성 문인들의 삶에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가혹한 시대 속 여성의 비극과 박순애의 연대
실제 조선에서 삼호정시사와 같이 지성과 예술을 탐하던 여성들의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한들, 당시 조선 사회는 일반적인 여성들에게 결코 너그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성들은 극심한 사회적 제약과 뿌리 깊은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특히 정조를 잃은 여성은 이유를 막론하고 인간다운 대접은커녕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일쑤였으며, 양반 가문의 여성일수록 가문의 명예에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쳤다는 이유로 더욱 가혹한 시선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야기 속 가장 큰 피해자인 은월 역시, 분명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잣대 앞에서 조사의 대상이자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삼호정시사가 극히 예외적인 문화 공간이었다면, 대다수 여성의 삶은 이처럼 냉혹한 현실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규방 부인 정탐기』는 이처럼 숨 막히는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와 여성 차별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안타깝고 비참한 운명을 묵직하게 조명합니다. 특히 작품 속 사형 장면에 대한 잔혹한 묘사나, 박순애가 악행을 저지른 완산당에게 '장형 백 대'라는 잔혹한 형벌의 실체를 구체적이고 섬뜩하리만큼 자세하게 설명하며 응당한 벌을 상기시키는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악인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를 것임을 선언하는 박순애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강렬하고 직설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조선 여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한 깊은 연민과 더불어, 악행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갈망하게 됩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잔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박순애라는 인물을 내세워, 잘못 없이 억울하게 죄인으로 내몰렸던 무고한 여성들의 한과 설움을 접한 독자들이 느낄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순애의 활약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강렬한 연대는 단순한 미스터리 해결을 넘어, 억압받던 여성들의 아픔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그들의 존엄을 되찾아 주려는 작가의 깊은 시선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흥미진진한 추리극이라는 외피 속에 역사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과거 무고한 피해자들이 겪었던 억울함을 현대 독자들이 정서적으로 위무(慰撫)받을 수 있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죽음
'며느리의 죽음' 에피소드는 한 며느리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를 선보입니다.
밝혀지는 사건의 범인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는 설정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서 작가는 말합니다.
"저런, 안타까운 사연이네. 하지만 가난하다고 전부 다 죄를 지으면서 살지는 않아. 결국 자기 선택이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지."
한 개인의 비극을 손쉽게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환원하며 사회의 냉혹한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연한 계기로 비극적인 살인 사건으로까지 번져버린 이 에피소드는 이전 사건에 비해 강렬함은 덜할지 모르지만,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시대적 한계가 빚어낸 비극을 섬세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소설은 다모 박순애가 열녀로 만들기 위해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다음 사건을 해결하러 떠나는 모습을 끝으로 마무리되며,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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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방영된 MBC드라마 다모 | 김금원의 저서 호동서락기 |
시대의 고통을 비추는 작은 등불
정명섭 작가의 『규방 부인 정탐기』는 단순한 추리 소설을 넘어섭니다. 작가는 "삶이 빈곤하면 죽음조차 빈곤할 수밖에 없는 건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비극"이라는 통찰을 전하며, 시대와 상관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고통을 짚어냅니다. 나아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어딘가에서는 여성이거나 어리다는 이유로, 혹은 돈이 없거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로, 이 소설이 단지 조선 시대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아픔과 닿아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소설 속 인물 다모 박순애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실존 인물 김금원을 통해 작품에 묵직한 역사적 진정성과 깊이를 부여합니다. 김금원의 파란만장한 삶과 실제 기록을 남긴 『호동서락기』의 내용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조선 시대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억압받던 시대에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그녀의 삶은 '여성 인권', '불평등', '사회적 제약 속 개인의 저항'이라는 소설의 핵심 테마와 깊이 연결됩니다. 박순애가 개별 사건을 해결하며 '점'을 찍어간다면, 김금원은 그 점들을 잇는 '선'이자, 작품의 근원적인 메시지와 역사적 배경을 묵직하게 지탱하는 '배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규방 부인 정탐기』는 과거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며 흥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약자들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일깨우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바랐듯, 이 글이 세상의 편견과 폭력 속에 잊혀 가는 이들을 "잊지 않게 해주는 작은 등불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독자들 또한 김금원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따뜻한 위무와 함께 깊은 성찰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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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개봉동 명탐정』 어수룩한 개봉동 콤비의 사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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